캘리포니케이션 읽은것, 본것, 들은것

언제나 그렇듯이,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때면 주제를 특정하지 못하고 이 레퍼런스에서 저 레퍼런스로 낚시질하는 기분으로 떠돌아다니며 읽어댄다. 그 정처없는 과정은 정말이지 피곤하고 내키지 않는, 인내를 요하는 것일 뿐 아니라 상당한 지적 고문을 동반하는지라, 사이사이 딴짓을 하면서 머리를 식히며 나태해지는 마음을 달래줘야만 한다. 주로 그럴 때 써먹는 것이 미드 시청인데, 이러한 시기를 무사히 건너갈 수 있게끔 해주는 미드란 그 요건이 사실 까다롭다. 예를 들어, <24> 같은 것처럼 너무 심하게 몰입해서 일을 집어치우고 전 에피소드를 몰아 보게 되면 망하는 지름길이 된다. 그렇다고 다음 에피소드를 볼 마음이 들지 않을 만큼 시시하면 또 휴식 공급원으로서 쓸모가 없다. 안정된 휴식 공급원이 되려면, 일이 끝날 때까지 적어도 두 달은 지속적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에피소드들이 넉넉히 저장되어 있어야 하며, 따라서 시작한 지 얼마 안되는 시리즈나 감질나게 한 주에 간신히 한 에피소드씩 볼 수 있는 현재 방영중인 것들은 이런 면에서 아웃이다. 적어도 시즌 3개는 이미 지나 있어야 하는데, 이는 에피 양도 양이지만 또한 그 미드가 몇 시즌이나 연속으로 제작될 만큼 충분한 재미와 탄탄한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다는 방증이 되기 때문이다. <굿와이프>와 <덱스터>는 이런 점에서 재작년 여름과 지난 여름에 적절한 휴식원이 되어 주었으나 그 후로는 매주 에피소드를 기다리는 데 지쳐 이런 기능을 못하게 되었다. 

이번에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면서 이런 저런 드라마들의 시즌 1, 에피소드 1 들을 시험해 보다가 우연히 <캘리포니케이션>이라는 미드를 집어들게 되었는데… 이걸로 한동안 갈 수 있을 것 같다. 처음에는 괜히 쿨한 척하며 온갖 19금 대화들만 가득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, 보다보니 묘한, 병맛스러운 매력이 있다. 자기 비하적이면서도 자존심과 재능이 있는, 오랫동안 이렇다 할 소설을 쓰지 못했을 뿐 아니라 떠난 가족들을 되찾고 싶어서 힘들어하는 작가로 데이빗 듀코브니가 분한다. 데이빗 듀코브니는 <엑스파일>의 멀더 외에 <레드슈 다이어리> 같은 에로영화 나레이터 정도로 생각했는데, 엘에이에서 방황하는 뉴욕 브루클린 스타일의 지성에 히피스러운 면까지 갖춘 언더그라운드 작가로 너무 잘 어울린다. 이런저런 문학작품을 간간히 입에 올리는 게 정말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프린스턴과 예일 영문과 출신이더라. 듀코브니 별로 안좋아했었는데 이 드라마에서 완전히 다시 보게 되었다. 허세나 눈요기거리가 듬뿍 들어간 수많은 미국드라마와 달리 이 드라마의 핵심은 자학적 찌질함과 자포자기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,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중요한 뭔가를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고독하고도 끈질기고 개차반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상주의적인 주인공이다. 각 에피소드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섬세하고 다소 비관적인 내러티브 또한 마음에 들었다.

엄청나게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, 왠지 이 드라마와 오랫동안 사이좋게 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. 시즌 1은 파일럿이라 그런지 30분짜리인데, 그것도 일할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지 않고 딱 알맞게 머리를 식힐 수 있어 좋다.        

덧글

  • 파주댁 2014/01/31 13:23 #

    구구절절 이해가 가네. 문득 드는 생각이 우리는 방법론은 비슷한데, 컨텐츠는 좀 다르다는거. ㅋㅋ 나는 다운튼애비 재밌더라 요새.
  • daybyday 2014/01/31 21:09 #

    이글루에 블로그 있는거 몰랐네. 근데 나는 아무 글도 안보이는걸?? 다운튼애비 재밌어? 함 봐야겠다 ㅎㅎ
  • 파주댁 2014/02/01 00:03 #

    양가부모님 보시는 블로그가 있었는데, 자꾸 검색으로 이상한 사람들이 들어오고 해서 걍 다 비공개로 바꿔버렸어. 걍 휴면계정. 안그래도 하나 다시 살릴까 생각중이여. 글구 다운튼 애비는 재미가 있긴 한데...사람에 따라 지루해할수도 있을듯. 1900년대초반 영국 귀족들 이쁜 패션 보기, 일상 엿보기 뭐 이런 재미로 보자면 괜찮음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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